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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나가와 히로테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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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미나가와 히로테루는 1548년 시모츠케국의 미나가와 성 성주 미나가와 도시무네의 차남으로 태어났다. 그는 북간토 지역의 혼란 속에서 가문의 생존을 위해 우에스기 씨, 호조 씨 등과 협력하며 세력을 키웠다. 1576년 형의 급사로 가독을 상속받았으며, 호조 가문과의 대립과 협력 관계를 거치며 도쿠가와 이에야스와의 관계를 강화했다. 오다와라 정벌 때 도쿠가와에게 투항하여 영지를 안도받았으며, 이후 도요토미 정권과 도쿠가와 막부에서 활약했다. 1609년 개역 후 교토에서 근신하다가 1623년 사면되어 1만 석을 받았고, 1627년 80세로 사망했다. 그는 다도에도 조예가 깊어 센노 리큐의 제자인 야마가미 소지와 교류하며 『야마가미 소지기』를 받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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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나가와 히로테루
기본 정보
미나가와 히로테루 초상 (곤고지 소장)
미나가와 히로테루 초상 (곤고지 소장)
통칭또사부로
계명삼청원전선옹경승대거사
묘소도치기현도치기시미나가와 성내정의 곤고지
관위종사위 하, 야마시로 수
씨족미나가와 씨
부모아버지: 미나가와 도시무네, 어머니: 미즈타니 하루모치의 딸
형제히로카쓰
히로테루
히로히데
히로나가
히로타다
생애
시대센고쿠 시대 - 에도 시대 전기
생년덴분 17년 (1548년)
몰년간에이 4년 12월 22일 (1628년 1월 28일)
개명히로테루 → 노호사이 (법명)
정치 경력
막부에도 막부
섬긴 가문우쓰노미야 구니쓰나 ←→ 호조 우지마사 - 호조 우지나오 → 다키가와 가즈마스 → 우쓰노미야 구니쓰나호조 우지나오도쿠가와 이에야스 → 마쓰다이라 다다테루 → 도쿠가와 히데타다 → 이에미쓰
시모쓰케미나가와 번 번주
시나노이야마 번 번주
히타치후추 번 번주
가족 관계
정실나카미카도 노부쓰나의 딸 (호조 우지마사의 양녀)
쓰루코 (미부 쓰나요의 딸, 미부 요시오의 여동생)
자녀가쓰테루
다카쓰네
무네토미
딸 (유키 하루토모 양녀)
기타
특기 사항도쿠가와 히데타다를 섬겼고, 후일 유키 히데야스의 가신이 되어 후쿠이 번사.
번 임기
미나가와 번 번주 (미나가와가)임기: 1576년 ~ 1603년
후임: 마쓰다이라 시게노리
이야마 번 번주 (미나가와가)임기: 1603년 ~ 1609년
후임: 호리 나오요리
히타치 후추 번 번주 (미나가와가)임기: 1623년 ~ 1625년
후임: 미나가와 다카쓰네
대수: 1

2. 생애

1548년 시모쓰케국 미나가와성 성주 미나가와 도시무네의 차남으로 태어났다. 1576년 형 히로카쓰가 29세의 나이로 급사하면서 가독을 이었다.

1582년 혼노지의 변으로 오다 노부나가가 사망하자, 히로테루는 도쿠가와 이에야스와 합류, 덴쇼 임오의 난에서 도쿠가와 측으로 참전하여 호조 우지나오와 싸웠다.[7] 이후 도쿠가와 씨와 호조 씨는 화친을 맺었다.

1584년 호조 우지나오는 대군을 이끌고 미나가와 히로테루를 포함한 반(反) 호조 연합과 시모쓰케 국 누마지리에서 대치했으나 전면전은 없었다. 히로테루는 도쿠가와 이에야스와 우호 관계를 유지했다. 약 3개월 후, 고마키·나가쿠테 전투가 히데요시의 승리로 끝나면서 양측은 화해했다.

1585년 호조 우지테루는 히로테루를 토벌하기 위해 타이헤이 산성을 포위하고 불을 질렀다. 히로테루는 구사쿠라 산으로 옮겨 100일 동안 저항했으나, 도쿠가와 이에야스와 사타케 요시노부의 권유로 호조에게 항복했다.[9][10]

1580년 히로테루는 도쿠가와 이에야스에게 접근을 시도, 1581년 오다 노부나가에게 명마를 선물하고 "천하포무(天下布武)" 주홍 인장 등을 답례로 받았다.[1]

1585년 호조 우지나오가 우쓰노미야를 공격했을 때 미나가와 씨는 호조 측 선봉을 맡았다. 1588년 우쓰노미야 구니쓰나의 침공에 맞서 농성 중 뇌우를 틈타 총공격을 감행, 아카쓰 강(셋케쓰가와) 전투를 치렀다.

1590년 도요토미 히데요시오다와라 정벌 때, 히로테루는 도쿠가와 이에야스에게 투항하여 영지를 안도받고[14] 도치기성으로 거성을 옮겨 상업 발전에 힘썼다.

분로쿠・게이초의 역에 이에야스를 따라 나고야성에 주둔했고, 1600년 아이즈 정벌 때에는 도쿠가와 히데타다를 따랐다. 1601년 종4위하에 서위되었다.[17]

1603년 마츠다이라 타다테루의 오츠키가로가 되어 7만 5,000석을 다스렸으나,[18][14] 1609년 타다테루의 행실 문제로 이에야스에게 호소했다가 개역되었다.[19][14]

오사카 여름 전투에 도쿠가와 측으로 참전, 1623년 사면 후 히타치국에서 1만 석을 받았다. 1625년 은거, 1627년 80세로 사망했다.[14]

2. 1. 초기 생애와 가독 상속

1548년 시모츠케국 미나가와성 성주 미나가와 도시무네의 차남으로 태어났다. 어린 시절 미나가와 성의 귀문을 지키는 미나가와 지묘인에서 수행을 했다고 전해진다.

당시 북간토는 에치고국의 우에스기 씨, 사가미국의 고호조 씨 등 두 세력 간의 이권 다툼이 격화되면서 북간토에 할거하는 소세력들은 생존을 위해 종속과 이반을 반복했다. 미나가와 가문도 예외는 아니어서 1561년 도시무네는 미나가와 가문의 지성인 다이헤이잔성에 방문한 우에스기 겐신을 접대하기 위해 히로테루를 접대역으로 임명했다.

도시무네는 장남 히로카쓰보다 차남 히로테루에게 애정을 쏟았다. 히로테루는 도시무네와 함께 1563년 가와즈라성 공략, 1564년 에노모토성 공략에 참전했다. 1572년 정월, 도시무네가 호조 우지마사, 나스 스케타네와 연합하여 주가인 우쓰노미야 씨의 거성우쓰노미야성을 점령하고 오카모토 소케이를 살해했을 때, 남겨진 당주 우쓰노미야 히로쓰나의 유폐를 히로테루에게 명령했다.

1573년 도시무네가 호조 우지마사와 싸워 세키야도에서 우에스기 측으로 전사(우에스기 겐신과 싸워 호조 측으로 전사했다는 설도 있다)하자 형 히로카쓰가 당주가 되었다.

1575년 히로테루는 호조 측으로 사노 씨의 가신 히라노 히사쿠니가 지키는 아와노성을 가신 사이토 히데타카에게 명하여 함락시켰다. 1576년 형 히로카쓰가 29세의 나이로 급사하면서 가독을 이었다.

2. 2. 호조 가문과의 대립과 협력

1582년, 혼노지의 변으로 오다 노부나가가 사망하자, 호조 씨는 오다 씨에 반기를 들고 간다바라 전투에서 다키가와 가즈마스와 대치하여 가즈마스를 격파했다. 이때 히로테루는 사노 후사쓰나, 사촌 미즈타니 가쓰토시 등과 함께 가즈마스를 따라 도쿠가와 이에야스와 합류했다. 다케다 씨의 옛 영토인 시나노 국, 가이 국을 두고 호조, 도쿠가와 씨, 우에스기 씨 등이 다툰 덴쇼 임오의 난에서는 도쿠가와 측으로 참전하여 와카고의 전투에서 호조 우지나오와 싸웠다.[7]

이후 도쿠가와 씨와 호조 씨는 화친을 맺었다. 이로써 호조 씨의 적은 북간토 지역만 남게 되었다. 고즈케 국을 거의 수중에 넣은 호조 씨의 북간토 침공은 더욱 거세졌다.

1584년(덴쇼 12년), 호조 우지나오는 대군을 이끌고 미나가와 히로테루, 우쓰노미야 구니쓰나, 사노 무네쓰나, 사타케 요시시게, 유키 하루토모 등 반(反) 호조 연합과 시모쓰케 국 누마지리(현재의 도치기 현 도치기 시 후지오카 정)에서 대치했다. 양측의 대치는 110일 동안 이어졌고, 작은 충돌은 있었지만 전면전은 없었다. 하지만 반 호조 연합 진영에는 철포가 대량으로 준비되는 등 일촉즉발의 상황이었다. 이 전투는 도쿠가와 이에야스도요토미 히데요시(하시바 히데요시) 간의 고마키·나가쿠테 전투와 관련이 있으며, 호조는 도쿠가와와, 반 호조 측은 하시바와 관계를 맺고 전황에 따라 서로 원군을 파견하려 했다는 설이 있다.

이 시기 히로테루는 반 호조 측이었지만,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고마키·나가쿠테 전투와 소무사에 관한 서신을 보내고, 히로테루는 이에야스에게 말을 헌상하는 등 우호 관계를 유지했다.

약 3개월 후, 히로테루는 우쓰노미야 측의 퇴각로인 이와후네 산을 호조 측에 빼앗겨 열세에 몰렸고, 연합했던 사타케 측도 호조 측의 책략으로 혼란에 빠졌다. 그러나 고마키·나가쿠테 전투가 히데요시의 승리로 끝나면서 도쿠가와와 관계를 맺고 있던 호조 측도 불리해져 양측은 화해하고 전쟁을 끝냈다.

이후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간토에 군대를 파견하지 않고 규슈 정벌에 나서자, 호조 측의 북간토 공략은 더욱 거세졌다. 미나가와 성은 고야마 성의 호조 우지테루, 가라스야마 성의 호조 우지타다, 미부 성, 가누마 성의 미부 요시오 등 호조 측 세력에 포위되었다.

1585년(덴쇼 13년), 호조 우지테루는 히로테루를 토벌하기 위해 대군을 이끌고 후지오카 성에 입성했다. 미나가와 군은 사타케 요시시게의 원군과 함께 타이헤이 산성에 진을 치고 맞섰다. 미나가와 측은 게릴라전을 펼치려 했지만, 호조 측은 타이헤이 산성을 포위하고 불을 질렀다. 이 화재로 타이헤이 산 신사를 비롯한 많은 신사와 사찰이 불탔다. 히로테루는 군을 구사쿠라 산으로 옮겨 100일 동안 저항했다.

타이헤이 산을 점령한 호조 군은 구사쿠라 산으로 내려와 게릴라전을 벌였다. 미나가와 군은 천연의 산악 요새를 활용하여 우세하게 싸웠지만, 수적으로 우세한 호조 군에 밀려 많은 가신을 잃고 히로테루 자신도 자결을 각오할 정도로 몰렸다. 도쿠가와 이에야스와 사타케 요시노부는 히로테루에게 사자를 보내 호조에게 항복할 것을 권했다.[9][10]

이 항복은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간토 소무지령의 일환이라는 설이 있다. 구사쿠라 산 전투에서 전사한 미나가와 가신들의 시신을 매장한 천인총이 현재도 남아 있다. 호조 씨는 항복한 영주들에게 다시 배신하지 못하도록 호조 가문의 여자를 시집보냈는데, 히로테루는 이미 아내 쓰루코가 있었지만 호조 우지마사의 양녀(나카노카도 노부쓰나의 딸)와 결혼하게 되었다.

미나가와 씨가 호조를 따르면서 반 호조 측인 우쓰노미야 씨, 사타케 씨에게 위협이 되었다. 한편, 미나가와 성의 아와노 성은 사노 씨 측의 히라노 씨에게 함락되었다.[9]

2. 3. 오다 노부나가, 도쿠가와 이에야스와의 관계

오다 노부나가가 세력을 확대하던 덴쇼 8년(1580년), 미나가와 히로테루는 도쿠가와 가신 나카가와 타다야스와 친교를 맺고 도쿠가와 이에야스에게 접근을 시도했다.[1]

덴쇼 9년(1581년) 10월, 히로테루는 숙부 겐유의 도움을 받아 가신 세키구치 이와노카미를 아즈치성에 보냈다. 오다 노부나가 가신 호리 히데마사의 중개로 노부나가에게 명마 세 필을 선물했고, 노부나가는 매우 기뻐하며 "천하포무(天下布武)"의 주홍 인장 등을 답례로 보냈다. 당시 기나이(畿內)에서는 미나가와 씨의 지명도가 낮아, 노부나가는 히로테루에게 보낸 서장에 이름을 잘못 표기하기도 했다. 노부나가는 타키가와 카즈마스에게 명하여 도카이도의 안전을 보장해 세키구치의 귀환을 도왔다.[1]

세키구치는 돌아오는 길에 하마마츠성에서 도쿠가와 이에야스를 만나, 이에야스는 히로테루가 노부나가에게 접근한 것을 축하하며 앞으로의 교류를 약속했다. 우지 차를 선물로 주기도 했다.[1]

덴쇼 10년(1582년), 오다 가문의 고슈 정벌 이후 간토(関東)로 부임한 타키가와 카즈마스에게 히로테루는 우츠노미야 쿠니츠나, 사타케 요시시게 등과 함께 종속하는 자세를 보였다. 그러나 오다 가문은 호조 씨와도 우호 관계였기 때문에 복잡한 외교가 필요했다.[1]

2. 4. 우쓰노미야 가문과의 전투

1584년(덴쇼 12년), 호조 우지나오가 대군을 이끌고 미나가와 히로테루, 우쓰노미야 구니쓰나, 사노 무네쓰나, 사타케 요시시게, 유우키 하루토모 등 반 호조 연합과 시모쓰케국 누마지리(현재의 토치기현토치기시 후지오카정)에서 대치했다. 양측은 110일 동안 대치하며 작은 충돌은 있었지만, 결전은 벌어지지 않았다. 반 호조 연합은 철포를 대량으로 준비하는 등 일촉즉발의 상태였다. 이 전투는 도쿠가와 이에야스하시바 히데요시고마키·나가쿠테 전투와 관련이 있으며, 호조는 도쿠가와와, 반 호조 측은 하시바와 관계를 맺고 서로 원군을 파견하려 했다는 설이 있다. 히로테루는 반 호조 측이었지만, 도쿠가와 이에야스와 우호 관계를 유지하며 서신을 주고받고 말을 헌상하기도 했다.

이와후네산을 호조 측에 빼앗겨 우쓰노미야 측이 열세에 몰리고, 사타케 측도 혼란에 빠졌다. 그러나 고마키·나가쿠테 전투가 히데요시의 승리로 끝나면서 도쿠가와와 관계를 맺고 있던 호조 측도 열세가 되어 양측은 화해하고 전쟁을 끝냈다.

이후 하시바 히데요시가 규슈 정벌에 나서면서 호조 측의 북간토 공략이 격화되었다. 미나가와성은 고야마성의 호조 우지테루, 카라스야마성의 호조 우지타다, 미부성, 카누마성의 미부 요시오 등 호조 측에 포위되었다.

1585년(덴쇼 13년), 호조 우지나오가 우쓰노미야를 공격했을 때 미나가와 씨는 호조 측 선봉을 맡아 성하를 불태웠다. 그 해, 히로테루는 니시가타 쓰나요시가 지키는 니시가타 성을 함락시키고 세력을 확장했다.

1588년(덴쇼 16년), 우쓰노미야 구니쓰나가 사타케 요시시게의 원군을 받아 1만 5천의 군세로 미나가와 영지를 침공했다. 미나가와 군은 기요세 강에, 연합군은 이소기와 니시가타 성에 진을 쳤다. 미나가와 군은 후퇴하여 스와야마 성에 입성했고, 연합군은 3월 16일에 스와야마 성, 마나고 성, 가구라오카 성을 함락시켰다. 미나가와 가신 휴가노 민부는 히로테루를 호테이가오카 성으로 도망치게 했다. 히로테루는 우쓰노미야 군에게 쫓겨 산길을 따라 호테이가오카 성에 입성했다.

3월 17일, 연합군은 호테이가오카 성을 공격했고, 히로테루는 직접 활과 조총으로 응전하며 농성했다. 연합군이 성을 이중으로 포위했지만, 미나가와 군의 분전으로 성문에 들어가지 못했다. 갑작스러운 뇌우를 틈타 미나가와 군은 총공격을 감행하여 난전을 벌였다. 이때 흘린 피가 강을 붉게 물들여 아카쓰 강(셋케쓰가와)이라고 불리게 되었다고 한다.

성을 빠져나온 히로테루를 연합군이 추격했지만, 산중에 끌려들어가는 것을 깨닫고 중단했다. 미부 요시오가 우쓰노미야로 진군한다는 소식에 연합군은 철수했고, 호테이가오카 성은 폐성되었다.

1588년(덴쇼 16년) 12월, 히로테루는 가신 사이토 히데타카에게 명하여 아와노 성을 탈환하게 했다. 격전 끝에 히데타카가 전사했지만 16일에 성을 공략했고, 오치아이 도쿠운 입도를 성주 대리로 임명했다. 이 전투로 성이 잿더미가 되고 시체가 산을 이루었다고 한다.[9]

같은 해, 히로테루는 아버지 도시무네가 창건한 걸금사를 모리야마로 이전했다.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이전 건립비를 냈고, 이후 호조 씨와의 전투에서 전사한 병사들을 위로하고 있다.

2. 5. 도요토미 정권과 도쿠가와 막부

1590년(덴쇼 18년), 도요토미 히데요시오다와라 정벌 때, 히로테루는 호조 우지테루에 속해 오다와라성 다케우라구를 지켰지만, 같은 해 4월 8일 밤 몰래 성을 나와 이전부터 관계를 맺고 있던 도쿠가와 이에야스에게 투항하여 영지를 안도받았다.[14] 히로테루가 없는 미나가와성은 우에스기 가게카츠 등에 공격받아 함락된 것으로 알려졌지만,[9] 실제로는 발굴 조사나 사료를 통해 싸움 없이 성을 넘겨준 것으로 밝혀졌다. 이때 정실과 자식들은 미나가와 가신 세키구치 탄바의 측근 고세키 타로와 함께 전 미나가와 가신이자 니시야마다의 시라이시 마사요시의 저택에 숨겨졌다. 고세키는 그 후 적에게 발각되어 다이추지에서 죽었다.[15] 또한 미나가와성 안에 있던 금으로 만든 사슴이 다이헤이산에 묻혔다는 전설도 남아 있다.[16]

본래 영지를 인정받은 히로테루는 거성을 미나가와성에서 도치기성으로 옮기고, 서쪽으로 흐르는 바바가와를 해자로 하여 성하 마을을 정비했다. 미나가와 씨는 도치기시에 신메이구(신명궁), 만푸쿠지(만복사), 킨류지(근룡사) 등 많은 사찰을 이전해 왔으며, 슌소의 시대부터 도치기 마을 정비가 시작되었다고 여겨진다. 또한 히로테루는 적극적으로 오미 상인을 유치하여 야슈 삼베를 기반으로 상업 발전에 힘썼다. 이것이 현재 남아있는 창고 거리의 원형이다.(킨류지 잡기에서).

조선 출병이 시작되자 이에야스를 따라 나고야성에 주둔했다. 1600년(게이초 5년) 아이즈 정벌 때에는 도쿠가와 히데타다를 따라 우츠노미야로 갔으며, 시모츠케 오타와라성을 미즈타니 카츠토시, 오타와라 하루키요 등과 함께 지켰다. 그 후, 나베가케에 진을 치고, 우에스기 씨의 남하를 막았다. 이때, 아들 다카쓰네는 히데타다를 따라 시나노국 우에다성을 공격했다. 1601년(게이초 6년) 정월, 종4위하에 서위되었다.[17]

1603년(게이초 8년), 어린 시절부터 양육했던 이에야스의 여섯째 아들 마츠다이라 타다테루의 오츠키가로가 되었고, 타다테루가 시나노 가와나카지마번의 번주가 되자, 시나노 국내에서 4만 석을 추가로 받아 이이야마성을 하사받아, 옛 영지와 합하여 7만 5,000석을 다스렸다.[18][14] 그러나 타다테루는 어릴 때부터 난폭하여, 히로테루 등은 여러 번 간언했지만, 타다테루의 태도는 전혀 고쳐지지 않았다. 1609년(게이초 14년) 9월, 히로테루는 전역의 야마다 시게토키, 마츠다이라 키요나오와 함께 타다테루의 행실을 슨푸의 이에야스에게 호소했다. 그것을 들은 타다테루도 슨푸로 달려가, 오히려 히로테루 등의 노신들이 정무를 농락하고 있다고 호소했다. 이에야스는 타다테루의 말을 받아들여, 히로테루 등이 가신으로서 부적격하다는 결론을 내리고, 10월 27일에 개역되었다.[19][14] 개역 후에는 교토의 치샤쿠인에서 근신했다. 그 후, 삭발하여 로호사이(老圃斎)라고 불렀다.

오사카 여름 전투에서는 적남인 다카쓰네와 함께 도쿠가와 측에 참전했다. 1623년(겐나 9년) 5월에 사면되어 도쿠가와 이에미츠에게 부속된 후, 12월 28일에 히타치국니하리군 후추에서 1만 석을 받았다. 1625년(간에이 2년) 4월에 적남 타카쓰네에게 가문을 물려주고 은거했다. 명령에 따라 오토시슈(御咄衆, 오토기슈)로서 등성하기도 했지만, 2년 후인 1627년(간에이 4년) 10월 22일에 80세로 사망했다.[14]

한편, 히로테루의 아들 다카쓰네 대에 미나가와 씨는 다이묘의 지위에 복귀했다.

3. 문화적 측면

미나가와 히로테루는 센노 리큐의 제자인 야마가미 소지와 친분이 있었으며, 리큐의 다도 비전서인 『야마가미 소지기』를 받은 사람 중 한 명이다. 1586년,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분노를 사 고야산으로 피신한 소지가 1585년 기슈 정벌 (네고로지 방화)에서 도망친 히로테루의 숙부 겐유를 만나면서 인연이 시작되었다고 한다.

야마가미 소지는 1588년 5월부터 호조 영토에 들어간 후, 히로테루와 2년 정도 다도를 통해 교류하였다.

1590년 오다와라 정벌오다와라성에 농성한 히로테루는 함께 농성했던 소지에게 혈판 맹세로 비전을 청했다고 전해진다. 이를 통해 히로테루가 다도에 대해 높은 문화적 관심을 가졌음을 알 수 있다.

오다와라성을 탈출하는 히로테루에게 소지가 동행하여, 마찬가지로 도요토미 히데요시에게 항복했다. 4월 10일에 리큐의 중재로 소지는 히데요시에게 용서받았으나, 다회에서 히데요시의 분노를 사 처형되었다.[1]

4. 일화

센노 리큐의 제자인 야마가미 소지와 친교가 있었으며, 리큐의 다도 비전서인 『야마가미 소지기』를 받은 사람 중 한 명이다. 1586년도요토미 히데요시의 분노를 산 소지가 고야산으로 피신했는데, 1585년 기슈 정벌 (네고로지 방화)에서 도망친 미나가와 히로테루의 숙부인 겐유와 만난 것이 계기가 되었다고 한다.

야마가미 소지는 1588년 5월부터 호조 영토에 들어간 후, 미나가와 히로테루와 2년 정도 다도를 통해 친교를 맺었다고 한다.

1590년, 오다와라 정벌오다와라성에 농성한 미나가와 히로테루는 함께 농성에 참여했던 야마가미 소지에게 혈판 맹세로 비전을 청했다고 전해진다. 이를 보아 미나가와 히로테루는 다도에 대해 문화적으로 높은 관심을 가졌다고 생각된다.

오다와라성을 탈출하는 미나가와 히로테루에게 야마가미 소지가 동행하여, 마찬가지로 도요토미 히데요시에게 투항했다. 4월 10일에 리큐의 중재로 야마가미 소지는 히데요시에게 용서받았다. 그러나 다회에서 히데요시의 분노를 사서 처단되었다.

참조

[1] 문서 徳川秀忠に仕え、のち結城秀康の家臣となり福井藩士。
[2] 민화 栃木市に残る民話より 2016-12-01
[3] 서적
[4] 사전 各寺社の社伝より 2016-12-01
[5] 문서 皆川文書
[6] 서적
[7] 서적
[8] 서적
[9] 문서 皆川正中録
[10] 전승 地元伝承より 2016-12-01
[11] 서적 栃木の城
[12] 문서 皆川戦記
[13] 서적 とちぎガイドブック
[14] 문서 寛政重修諸家譜
[15] 전설 大中寺伝説による 2016-12-01
[16] 서적 美寿々の民話集とちぎのむかし百選
[17] 학술지 天正・文禄・慶長期、武家叙任と豊臣姓下賜の事例
[18] 서적
[19] 서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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